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장엽 망명 사건 (문단 편집) == 발단 및 전개 == 1996년 5월 10일 북한 관영지 <[[로동신문]]>은 당 내에 [[수령]]을 받드는 척하며 음모를 꾸미는 야심가가 있다는 기사를 내놓았는데 이는 [[숙청]]을 암시하는 기사였다. 7월에는 [[김정일]]이 황장엽에게 사상비판을 가했다. 이미 황장엽은 북한 내부에서 김정일의 권력 기반 장악을 위한 타겟이 된 상태였다. 당시 황장엽은 외국에 가서 [[주체사상]] 강의를 할 때 김정일이 원한 혁명적 수령관이 아니라 군중노선만 얘기하면서 김정일의 비위를 상하게 하였고 김정일의 연회정치, 선군정치에 대해 비판적이라서 김정일이 슬슬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다. 황장엽은 1997년 1월 30일에 김정일의 지시로 북일수교 및 경제원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나리타 공항을 통해 방일했다. 일본에서 [[조총련]]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지만 기자들에게 신경질을 내는 등 심상찮은 조짐을 보였다. 그는 기자회견에서 [[사회주의]]의 실패 운운하는 발언을 했고 일본의 야마자키 자민당 정책위원장과의 면담을 요청하며 식량 원조, 북일수교 문제를 논하려 했지만 미국의 압력을 받은 일본이 황장엽과의 면담을 거부해서[* 당시에는 황장엽 정도의 인사가 갑자기 망명할 거라고 예상할 수 없었으므로 당연한 조치였다.] 13일 간의 일본 체류에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쓸쓸하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. 그는 수행원 김덕홍과 함께 2월 12일 바로 중국의 북한 대사관으로 갔다가 다시 한국 총영사관으로 가서 전격적으로 '''[[탈북]]'''의 뜻을 전달하였다. 북한은 황장엽의 망명을 저지하기 위해 남한이 선물을 사러 외출한 황장엽을 납치한 것이라고 주장하다가[* 황장엽은 북한 대사관에 선물을 사러 가겠다고 말하고서 한국 총영사관으로 달려갔다.] 2월 18일에 그 주장을 접었다. 이후 북한은 대규모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하여 압박을 가했고 황장엽 망명과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황장엽의 망명 요청 불과 4일 후인 2월 16일에 이미 80년대 초반에 망명했던 김정일의 처조카 [[이한영]]에게 총격을 가해 끝내 숨지게 만들었다.[* 그런데 탈북자 출신 [[주성하]] 기자는 이한영의 사망 배후가 김정일이 아니라 러시아 마피아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다. 실제로 90년대는 그야말로 [[레드 마피아]]의 전성기였다.] 황장엽이 망명한 시기는 중국 [[덩샤오핑]]의 사망, 한국의 [[1996년 노동법 날치기]], [[한보 사태]] 및 [[이한영 암살 사건]]이 겹쳐 혼란했다. 이후 미국, 중국, 한국, 북한, 일본이 모두 개입된 치열한 외교전 끝에 망명의 뜻을 밝힌 지 67일 만인 4월 20일에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다. 그는 귀순하자마자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외쳤고 "처음으로 유서 깊은 역사의 도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본 심정은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"란 소감을 발표했다. 그의 수행원 김덕홍은 "설레이는 마음 진정할 수 없고 남녘형제들과 만나게 된 이 기쁨과 감격은 그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습니다"라고 했다. 그는 그의 동창인 [[유창순]] 전 국무총리와[* 같은 평양상업고등학교 출신] 제자이자 먼저 귀순한 현성일, 최세웅, 신형희 등과 오랜만에 해후했다. 망명한 [[황장엽]]은 [[1997년]] [[7월 10일]] 기자회견에서 "이미 북한 내부에서 [[핵무기]] 보유는 상식화되어 있다"고 폭로해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. 그는 조사 과정에서 "지난 85년 소련 측이 핵개발을 문제 삼자 김일성 부자가 이를 무시하라고 지시했다"고 밝혀 [[북한의 핵개발]] 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음을 알렸다.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핵 관련 시설을 직접 본 적은 없으나 1992년 국제 원자력 기구의 특별 사찰을 피하기 위해 [[핵확산금지조약]]에서 탈퇴하는 것을 보면서 [[조선로동당]]의 비서들은 모두 핵 보유를 믿게 됐다고 한다. 북한에서는 모두들 이미 북한이 [[핵무기]]까지 보유했다는 것([[1997년]] 당시)으로 이렇게 알고 (믿고) 있다는 것. [[http://news.kbs.co.kr/news/view.do?ncd=3775638|KBS]], [[http://imnews.imbc.com/20dbnews/history/1997/1985969_19482.html|MBC]], [[http://news.chosun.com/svc/content_view/content_view.html?contid=1997071070376|조선일보]],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7071100209106001&editNo=45&printCount=1&publishDate=1997-07-11&officeId=00020&pageNo=6&printNo=23590&publishType=00010|동아일보]],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7071100329103001&editNo=45&printCount=1&publishDate=1997-07-11&officeId=00032&pageNo=3&printNo=16156&publishType=00010|경향신문]] [[1985년]] 당시 [[소련]] 측이 북한의 핵개발을 문제삼은 이 내용은 [[1994년]] [[러시아]] 관계자들에게도 나온 이야기였다. 1994년 러시아 국가안보 연구소 블라디미르 쿠마초프 고문에 의하면 "북한은 그들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늘리기 위해 독자적으로 완성한 발사 차량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주의 체제 하의 다른 특정한 [[아프리카]] 국가들도 북한이 그러한 [[핵실험]]을 행한 것으로 알고" 있었다. 이에 더해 "소련도 85년부터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음을 알았고 그로 인해서 북한에 있던 핵전문가들을 본국으로 송환했다"고 밝혔다. [[http://news.chosun.com/svc/content_view/content_view.html?contid=1994021570705|조선일보]],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4021500329101001&editNo=15&printCount=1&publishDate=1994-02-15&officeId=00032&pageNo=1&printNo=15001&publishType=00010|경향신문]],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4021500289102009&editNo=6&printCount=1&publishDate=1994-02-15&officeId=00028&pageNo=2&printNo=1815&publishType=00010|한겨레]]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북한의 사정이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황장엽이 세계의 이목을 끌기 위해 과장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비판이 주를 이루었으나.... 결과적으로 적어도 이 소재에 대해서는 진짜 있는 그대로를 증언한 것으로 밝혀지고 말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